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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화장실은 왼쪽일까, 오른쪽일까?’ 사물을 색이나 형태로 희미하게 구분할 수밖에 없는 시각장애 1급인 김모씨는 늘 지하철 화장실 앞에서 주저한다. 눈을 가늘게 뜨고 그림문자 표지판을 바라보지만, 그림 속 옷이 치마인지 바지인지 도통 파악할 수 없다. 점자 표지판 찾기는 포기한 지 오래다. 혹시나 싶어 화장실 입구 옆 벽을 더듬어 봤지만, 이마저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용변을 참기가 어려워질 때쯤 왼편 화장실에서 누군가 또각또각 하이힐 굽 소리를 내며 걸어 나왔다. 그제야 김씨는 서둘러 오른편 화장실로 향했다.
시각장애인들이 지하철 화장실의 안내 시설 미비로 이용에 불편을 겪고 있다.
유명무실 점자 표지판, 픽토그램…일정한 기준 없어
‘장애인·노인·임산부 등의 편의증진 보장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공공 화장실의 출입구 옆 벽면 1.5m 높이에 남자용과 여자용을 구별할 수 있는 점자 표지판을 부착해야 한다.
그러나 크기·부착 위치 등 상세한 기준은 전무하다. 현재 지하철 화장실에 설치된 점자 표지판은 가로 10㎝, 세로 3㎝의 작은 크기부터 가로세로 20㎝ 이상까지 다양한 형태를 띠고 있다. 이렇듯 통일성이 없는 표식을 시각장애인이 ‘점자 표지판’으로 인지하기란 쉽지 않다. 법령에 정확한 설치 위치가 명시되지 않은 점도 문제다. 출입구 벽의 정면 또는 측면 등에 부착해야 한다는 정확한 기준이 없다. 이로 인해 표지판의 위치는 제각각이다.
성별을 표기하는 그림문자인 ‘픽토그램’에 대한 색상·크기 기준 역시 없다.
2016년 서울 지하철 내 화장실 픽토그램에 쓰이는 색은 각각 흰색, 회색, 검정, 파랑, 빨강 등으로 일정하지 않다. 서울 지하철 2호선 신천역의 경우 화장실 픽토그램이 모두 무채색으로 되어 있어 저시력 장애인은 구별하기 어렵다. 같은 2호선인 당산역 화장실의 픽토그램 6개 중 4개는 저시력 장애인이 알아보기 힘든 수준으로 작다.
시각장애 1급인 심지민(34·여)씨는 “지하철 화장실 표지판이 작을 경우, 시야에 확보되지 않아 길을 헤매는 경우가 많다”며 “특히 저시력자의 입장에서 엘리베이터와 화장실 픽토그램이 뚜렷하게 구분되지 않아 헷갈릴 때가 있다”고 밝혔다.
뒤죽박죽 남·녀화장실 위치…시각장애인 ‘멱살·따귀’ 봉변 겪기도
‘왼쪽은 남자, 오른쪽은 여자’처럼 화장실에 대한 일정한 위치 기준이 없는 것 또한 시각장애인에게는 불편 사항이다.
동서울장애인자립생활센터(동서울센터)에 따르면 2015년 6월 기준 서울 지하철 5호선 전체 74개 화장실 중 여성용 33곳과 남성용 32곳이 왼쪽에 위치했고, 나머지 9곳의 위치는 모호했다.
동서울센터의 오병철(46·시각장애 1급) 소장은 “시각장애인은 지하철 화장실 앞에서 자신의 성별에 맞는 화장실이 어디일지 고민한다”며 “급할 때도 성별 구분을 위해 누군가 화장실에서 나오길 기다려야 한다”고 토로했다.
이어 “어딜 가든 남자 화장실은 왼쪽, 여자 화장실은 오른쪽처럼 동일하다면 시각장애인의 불편을 덜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시각장애 1급인 이보훈(45)씨도 지하철 화장실 이용에 대한 고충을 털어놨다.
이씨는 “저시력자인 남성 장애인들이 여자 화장실을 남자 화장실로 착각해 들어갔다가 봉변을 당한 경우가 많다”며 “남성 시각장애인들이 성추행범으로 몰려 멱살을 잡히거나, 뺨을 맞을 뻔한 사례도 있다”고 말했다.
“남·여 화장실 위치, 안내 표지판 통일된 기준 마련해 달라” vs “실질적 시행 어려워”
동서울센터는 지난해 8월31일 서울메트로와 서울특별시도시철도공사를 상대로 인권위원회에 차별 진정을 냈다. 지하철 내 남녀화장실의 일정한 위치 기준과 눈에 잘 띄는 화장실 표지판 디자인 기준 마련을 요구한 것이다.
그러나 진정 대상이었던 서울특별시도시철도공사(철도공사)는 11일 “동서울센터가 진정을 낸 ‘시각장애인에 대한 지하철 역사 내 이동 편의 제공 미흡’ 사건에 대해 인권위원회가 지난 5월 기각을 결정한 것으로 알고 있다”며 “남·여 화장실 위치 변경의 경우 예산이 많이 들어 실제로 시행이 어렵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이어 “철도공사가 운영 중인 서울 지하철 5·6·7·8호선에 저시력 장애인과 교통약자들이 지하철 내에서 편하게 길을 찾을 수 있도록 방향유도표지판을 LED로 바꾸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며 “시각장애인의 접근성 개선을 위해 노력 중”이라고 설명했다.
서울 지하철 1·2·3·4호선을 운영하는 서울메트로는 “남·여 화장실 변기 수 등을 고려할 때 실질적으로 개선하기가 어렵다”면서 “안내표지판에 대해서는 시각장애인협회와 지속적으로 협의해 개선해나갈 것”이라고 전했다.
“장애인 고려 없이 지어진 공공시설, 시각장애인 접근성 높여야”
전문가들은 “지하철 등 공공시설이 시각장애인을 위한 접근성 확충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인천대학교 사회복지학과 전지혜 교수는 “과거 장애인에 대한 고려 없이 공공시설이 지어졌다”며 “이미 설치된 것을 바꿀 수 없다면 유도 블록과 표시판 등을 제대로 설치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어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지하철 역사 내 편의시설 관련 음성 안내를 하는 등 평등한 정보 제공이 필요하다”며 “새롭게 시설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현재 있는 시설을 장애인도 함께 이용할 수 있도록 접근성을 높여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장애인개발원 유니버설디자인환경부 배리어프리(BF)인증팀 권영숙 팀장은 “독일 화장실의 경우 저시력자, 노인 등이 멀리서 봐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커다란 픽토그램을 설치하고 있다”며 “우리나라는 시설을 설계할 때 화장실을 구석으로 숨기는 경향이 있는데, 화장실 픽토그램을 디자인적으로 어우러지게 개선하는 방향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관계자도 “외국의 경우 초기 설계 단계부터 통일성을 두고 건물을 건설하지만 우리나라는 그렇지 않다”며 “최소한 시각장애인을 위해 안내 표지판의 크기, 색상 등 기준을 통일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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